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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아(幻想我)와 현실아(現實我)

October 26th, 2007

최근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갑자기 문장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 그 책이 없어 정확히 인용은 못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3가지 종류에 대한 것이었다. 1. 생각없이 글을 쓰는 사람, 2.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사람, 3. 생각을 모두 마친 후 글을 쓰는 사람. 이렇게 세 종류가 있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쓸 때는 2번과 3번의 중간 정도다.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는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2번은 아닌 거 같지만, 3번이 아닌 이유는 어떤 심상(?)이 떠올라서 키보드를 잡았지만 글을 쓰다보면 다른 길로 새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1, 2번은 쓰레기 작가라고 말한다.)

제목을 환상아와 현실아로 정한 것은, 조금 전 지하철에서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1권을 읽으며 사고에 잠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이 나오는가?

그것은 이 포스팅이 이전 블로그 포스팅의 글들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서이다. 난 집에서 나오면서 그저 이 책을 집어들었고 지하철에서 할 일이 없어 읽었을 뿐인데, 내 관심사가 변경되어버렸다. 이거야말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분별없는 새끼가 아니던가. 그래도 글을 계속 쓰는 이유는 이 세상에 분별있는 새끼가 거의 없고, 나같은 인간이 글을 써도 사회적으로 그다지 부끄럽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좋고 나쁨을 떠나, 며칠 전 마지막 포스팅에서 나는 초자아를 들먹이며 글을 썼고 댓글에 가서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33페이지 중간쯤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읽고 수긍했다.

환상아와 현실아의 갈등에 관한 최종적 해결법은 자살밖에 없지만, 일시적 해결법 또는 임시변통으로 위안이 되는 허황된 해결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술을 마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취하면 현실아는 잊혀져 버리며 나르시시즘이 고양되고 전능감이 자극되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심경이 된다. 자기와 타자의 경계가 몽롱해지고, 세계는 무한히 열리며, 모든이가 자신의 같은 패거리로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취기가 가시기까지의 일이다. 숙취가 주는 개운치 않은 뒷맛은, 생리적 요인도 있으려니와 그보다도 주로 모처럼 쫓아버렸던 현실아가 다시금 뻔뻔스럽게 되돌아와 있는 현실을 접하는 씁쓰레한 느낌이 아닐까 여겨진다.

내가 술을 마시며 기시다 슈가 말하는 것처럼 그닥 전능감이 자극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자살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내가 요즘 현실아와 환상아에 대한 갈등이 점점 더 커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실로 내가 현실아를 피하는 방법은 정말로 많다. 현실아를 인지하려면 타인과 꾸준한 교류를 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저 타인과의 교류를 안하면 현실아를 일시적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과도 그다지 친하지 않다. 교류를 하면 할수록 현실이 드러나서 나의 환상아가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와 비교적 문제없이 계속 마음을 터놓으며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인내력이 훌륭했거나, 나에게 흑심이 있었거나 (여기까지는 너무 극단적이다) 나와 비슷한 환상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환상아. 그럼 말이 통하기 마련이다. 환상아가 비슷하니 말이 잘 통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슷한 현실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서 더욱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물론 대화는 잘 통하겠지만 현실에서 그들끼리 묶여서 무엇을 잘 수행할 것 같지는 않다.

아, 현실아와 환상아에 대한 소개가 없었다. 간단히 옮기겠다.

갓태어났을 때, 인간의 유아는 현실을 알지 못하고 대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현실과 비현실(환상)의 구별, 또는 자기와 대상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현실은 비현실 속에, 대상은 자기 속에 포함되어 혼연일체를 이룸으로써 불분명한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상태가 거의 그대로의 형태로 생후 얼추 1년 동안이나 이어진다. (불완전한 형태로는 어떤 의미에서 한평생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장기간에 걸쳐 이 같은 상태가 이어지는 결과, 인간의 충동생활과 인격 구조에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특수한 이지러짐(왜곡)이 생긴다. 곧, 인간에게는 그 나르시도(narcido)는 처음에(현실과 구별되어 있지 않은) 비현실의 환상 속의 (대상과 구별되어 있지 않은) 자기와 결합된다. 본래 같으면 현실적 자기 (이하, 이를 현실아로 부르기로 하고)의 보존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나르시도가, 비현실적 자기 (이하, 이를 환상아로 부르기로 하고)의 보존을 위한 방향으로 일탈한다.

어찌됐든 난 나의 현실아를 계속 외면해왔고, 그로 인해 점점 더 현실아를 인지하기 어려운 형국에 이르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가는 것을 피하는 것도 이러한 자리에 나가면 현실아가 더욱 더 드러나서 기분이 좋지 않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즐거운 자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왔더라도 별 이유 없이 조낸 센티멘탈한 밤이 되는 것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순간 순간에서 자신의 현실아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떨어진 체력을 느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솔직히, 환상아에 대한 집착을 단념하기는 싫은 것이 사실이다. 허나 환상아를 택하고 살면 현실의 손해와 고통은 피하기 어렵다.

환상아를 버리자니 굴욕적인 삶이 되고 현실아를 버리자니 자살밖에 방법이 없다. 역시 이 주제도 답은 없었다.
그저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알게 됨으로서 어느정도 위안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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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ctober 31st, 2007 at 06:08 | #1

    누구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꿈을 깨면 괴로워지는건 당연한거고. 깨지 않는 게 제일인데..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어버렸다.

  2. October 30th, 2007 at 09:41 | #2

    20대때 책하나도 안읽다가…요즘들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몰랐던 ‘현실아’가 내눈에 보이기 시작해서
    그동안 ‘환상’속에 살았던 것이었나. 라고 느끼고 있는중.

  3. October 26th, 2007 at 02:52 | #3

    그런데 그 현실이라는 것은 주위 구성원들이 만들어낸 (혹은 주입된) 공동환상에 불과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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