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이걸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활용해버리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 명시적으로 일일이 질문하기보다는 맥락을 알아서 추론하고 흐름 타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니 열등감이 있는 대상인 경우 무시받는 기분을 느낄 위험이 있다.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있어야 관계도 즐거운 게 아니던가.
기계는 질문을 받을 때 질문자의 의도를 궁금해하지 않지만 인간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뒤 실제 질문 내용과 자신의 이익도 고려한 뒤 이를 병합하여 응대하는 과정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질의의 순수성이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깔끔하고 쿨한 업무 관계라면 별문제 없겠지만 관계에 컨텍스트가 덕지덕지 쌓이고 나면 대화에서 자아를 분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강도 높게 일할 때는 기계한테 하던 버릇을 써도 좋지만 평상시 인간한테 하면 상대방 멘탈이 날아간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인간들과 관계해도 되지만, 프로그래밍은 프로그래밍일 뿐 어차피 본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본인에게 엄밀하고 정확하게 대하면 본인도 나가떨어진다. 숙련도가 높다면 남들보다 아주 오래 버틸 수 있을 뿐이지 그래봐야 인간이라 머지않아 바닥이 드러나게 된다. 가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 사회에서 사이코패스라는 부정적 단어로 분류되어 있다.
프로그래밍과 현실을 오버랩하기 시작하면 비사회적이 될 뿐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기계에 비해 무결성이 엄청나게 낮으니 조만간 현실이나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될 것이고, 폭력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쓰레기들 다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된다는 타노스나 라스알굴 마인드가 생길 테고, 온순한 사람이라면 준성인급 저자들이 쓴 고전책들로 도피할 것이고, 기운이 약한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것이다.
프로그래밍 학습을 통해 사람이 성장하는 건 해외에 나갔다 와서 성장하는 거와 비슷한 면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습득했던 모국어나 자국 문화가 더 이상 동작하지 않으니 무의식에 있던 것을 일일이 의식으로 뽑아내서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메타인지력이 오를 수밖에 없으니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유연해지는 것과 비슷한 거다.
또한 인간사회에서는 의사처럼 특별한 권한이 없는 한 디버깅을 허용하지 않는다. 디버깅하며 기른 사고력을 인간관계에서 꺼낸다면 그저 오만한 녀석이나 꼰대가 될 것이다. 고민 상담이나 역술인처럼 버그가 스스로 찾아와서 디버깅을 요구한 경우만 적합하다.
프로그래밍하면서 생긴 습관을 현실에서 엄하게 적용하다 피해를 본 기억이 많아서 글이 길어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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