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 중독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최근 몇달간 이유 모를 슬럼프에 계속 빠져있었는데, 매년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이유가 무엇인지 찾곤 했습니다. 정말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한가지 공통적인, 어떤 깊고 깊은 이유가 있다고 하기엔 우리들의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기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슬럼프에 빠진다면 보통 그 사람은 게으름과 나태함을 보이는 것이 보통일텐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난 왜 이렇게 게으를까.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자.' 생각하는 것, 혹은 타인으로부터 그런 충고를 듣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야 되는데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생각해본 결과 어떤 한 가지 이유만으로는 사람이 갑자기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독자의 피로감을 덜어드리기 위해 책임감 중독 이야기로 넘어갈까 합니다. 슬럼프에 빠진 여러가지 이유 중에 단 한가지, 책임감 중독에 대해서 입니다.
책임감 scope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전 모호한 것을 상당히 싫어합니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 구석구석까지 다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그 모호함을 적절하게 유지하고 견디는 능력을 훈련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열정적으로 수행할 때는 어느 하나 빼먹는 것 없이 치밀하게 처리합니다만, 무엇 하나 제 통제권에서 벗어나면 불안함에 잠못 이루고 집에가서 밤을 새며 통제권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기도 하고, 제가 자주 하던.. 장난감 만들기 등을 하며 통제권을 얻고 불안감을 해소합니다.
장난감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은 각 단위 기능의 복잡도만 제외 되었을 뿐 어떤 제품의 전체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고, 배포도 하고 고객 서비스부터 유지보수 등등 까지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해줍니다. 그런 장난감 개발을 자주 하다보면 통제권을 항상 거머쥐는 것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 시 불안감을 늘려줍니다.
안타깝게도 첫 회사 근무시부터 여태까지 프로토콜을 맞추는 것을 제외하곤 협업을 해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혼자 개발하는 것은 빠른 프로토타입 개발에는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겠지만 제품 수준으로 넘어가면 지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작업을 기다리는 시간을 관리하는 방법도 익히지 못하며 (그 시간동안 다른 일을 먼저 하는 게 아니라 머리속에서 프로세스가 스파게티처럼 꼬이고) 의사소통 능력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협업을 하게 됩니다. 스케일이 너무 크거나.. 혹은 관계적인 이유로 프로젝트 전체의 통제권을 잃어버리게 되면, 평소 혼자 작업하던 것을 상상하며 불필요한 자책감에 빠지기도 하고 슬슬 책임을 회피하게 됩니다. 동료들에게 의존성이 걸려있다고 착각하고 자신의 업무를 뒤로 제쳐놓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들이 진행하는 것을 그저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이대로 놔둘 순 없어 전장에 달려들자!!!'.
그리고 공격적으로 다시 일을 처리합니다. 책임감 과잉 상태가 되는 거지요. 이러면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을 회피하는 상태로 만듭니다. 그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다가, 책임을 다 놓기로 하고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책임감 과다 상태'의 그는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다가 번 아웃 신드롬 빠지게 되어 책임 회피 상태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평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런 평판을 얻게 되죠. '저 사람은 능력이 있는데도 그저 팔짱만 끼고 앉아있다.'
그렇게 계속 반복되다가 '이건 아니다' 싶을 때면 일을 그만둡니다. 일을 그만두는 것은 저처럼 잃을 것 없는 대책 없는 사람들에게나 보이는 것이고 대부분은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적당한 시점에 다시 책임 과잉 상태로 돌변합니다.
해결책은 충분히 솔직한 대화를 통해 적절히 책임을 나누는 것이나 책에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가진 4가지 지배 가치 때문에 이것이 쉽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4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지 말고 이겨야 한다 언제나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난처한 상황을 피해야 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을 유지한다.
책 내용과 제 자신의 경험을 섞어,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에게 책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보았습니다. 이 책의 2/3 정도는 책임감 중독에서 벗어나오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컨셉은 훌륭하지만 실제로 이것을 따라 수행하기엔 약간 디테일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책을 읽고 책임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때 처럼 인상 깊었던 구절 몇개를 옮기고 마치려 합니다.
집단 사고에 대한 연구보고서나 집단 규범과 행동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보고서는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해서 의사결정의 질이 높아지니는 않는다고 말한다. 의사결정권자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면 자신의 권한에 확신을 느끼지 못해 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p26 영웅적 리더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수동적인 부하 직원을 양산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수동적인 부하 직원들이 소심하고 감정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리더십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 짓는다. p27 왜 두 사람은 서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책임을 도맡아 행동하는 것만 생각하든지 아니면 아예 책임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버리기 때문이다. p39 책임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폐쇄된 세계에 빠져든다. 책임감 바이러스에 빠지면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보이기 때문이다. p43 뒤로 물러섬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난처함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p58 이런 완벽주의는 사람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안전한 길을 선택하고, 결국 모호한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든다. p58
책임 과잉과 책임 회피의 사이클
[책임 과잉]
-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제 3세계를 도울 수 있는 차관을 제공하는 정의로운 목표를 세운다.
-
국제 기관과 그 기관의 다른 사람들이 도와줄 거라 기대한다.
-
좋은 차관, 국제융기관을 바꾸는 일, 자신이 속한 기관을 위해 자금을 확보하는 일에 책임을 느낀다.
-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고 승리하기 위해 투쟁한다.
-
조직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해주지 않고 어려운 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
포기한다.
[책임 회피]
- 실패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동료들의 탓이다.
- 어쨌든 내 지역, 내 고향 일이 아니다.
- 실행 불가능하다.
- 이곳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 실행 가능한 일만 집중한다.
- 동료와 개인적인 의견을 교환한다.
- 공개적으로 의논하지 않는다.
- 예상 그대로의 결과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 냉소주의가 팽배하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다가.. 다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책임 과잉 상태로 돌아간다.
오랜만에 괜찮은 책을 읽었습니다.
Comments
6 thoughts shared
책 내용을 정리한 이 글이 좋은 내용인지 책이 좋은지 모르겠다. 흐흐. 아무튼 이 글만 보면 재밌어 보여. +_+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불타오름은 과한 책임강 때문에 일을 혼자 부둥켜쥐려 하고, 그러다 협업 과정에서 일이 틀어지면 방관이 되다가 나중엔 일을 그릇치고 포기.
몇 번 그러니 한 3년이 없어졌더라. @_@ 나도 좀 벗어나야 하는데...
http://www.wooribizclub.com/file_save/20109/(20060529)BOOK.pdf
10페이지로 요약한 '책임감 중독' 이야. 좀 딱딱한 요약이긴 하지만, 구입 전에 읽어보기엔 충분할 것 같아~
정철민
책임감중독 번역한 사람입니다. 저도 책임감 중독때문에 고생해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읽으셨네요. 책임감 중독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도움됩니다. 하지만 책임을 느끼는 정도는 우리 기질과 경험과 관련되어있어 벗어나기 참 힘든것 같습니다(제경험입니다) 글도 잘 쓰시고 적용을 잘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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