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가 쓴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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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전 중학교 친구와 신천 한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세계정복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갖 가설뿐인 즉흥적인 이야기를 듣다 지친 친구가 내게 말하길.

"책으로 써봐. 악용 소지가 있는 부분만 싹 빼고. 글로 정리하다보면 빠진 부분도 보이고 생각 정리가 잘되잖아."

수일동안 내내 세계정복 이론에 대해 끊임없이 검토하고 응용해보던 내가 빼먹고 있던 부분이었다. 성문화할 생각이나 책으로 쓸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미리 생각한 게 없었던 것만큼 그저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서, kenu님과 식사를 할 일이 생겨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필 중인 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뜬금없이 책이 쓰고 싶어졌다.

그날 집에 돌아가 출판사에 저자 신청서를 보냈다. 막 생각나는대로 썼다. 아.. 이제 일이 벌어졌구나.

요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개념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기에, 꽤 내공이 있는 지인들로부터 욕먹을까봐 입에 발린 글이나 혹은 방어 문체로 난무되어서 읽는 이를 지치게 하는 글을 쓰기는 싫었다. 그래서 돌려말하기라고는 일체 없는 쇼펜하우어와 이외수의 책을 읽으며 글쓰기 내공을 쌓기로 했다.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이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 강력하여 스스로에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서적이다. 소설가가 쓴 책이기 때문에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필요없는 것이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정신으로는 매쉬업도 못만들고 문서도 못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혁신이란 무엇인지 더 생각해보고 이 글을 다시 읽기 바란다.

103쪽, 경계해야 할 병폐들에서 3개 내용중 일부를 옮겨본다.

가식

가식은 척하는 병이 만들어낸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온갖 척하는 병들이 난무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많은 감염자를 거느리고 있는 풍토병도 그놈의 척하는 병이다. 감염되면 민간요법 정도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 (중략) 글을 쓰기 전에 철저하게 가식을 경계하라. 가식은 여러 종류의 척하는 병들을 불러들일 뿐만 아니라 글쓴이의 인격을 격하시키고 글의 궁극적 목표인 감동이나 설득력을 깡그리 말살시킨다.

욕심

야구경기를 중계할 때 해설자들은 투수나 타자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타격이나 투구를 망친다는 말을 자주 한다. 투수나 타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욕심 때문이다. 경기를 주도하고 싶다는 욕심.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싶다는 욕심. 승리의 주역이 되고야 말겠다는 욕심.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만인이 탄복해 마지않는 문장을 만들어 보겠다는 욕심. 지금 쓰고 있는 글을 통해 금세기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받고 싶다는 욕심. 이러한 욕심들이 응어리진 채로 의식을 메우고 있으면 절대로 경탄할 만한 글은 나오지 않는다. 그대의 문장에서 욕심을 퇴출시키고 소망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그대의 글쓰기가 공염불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허영

허영 중에서도 글쓰는 사람들이 특히 매력을 느끼는 허영이 지적(知的) 허영이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창작을 하더라도 보고서나 논문을 연상시키는 문장들을 구사하게 된다. 소화되지 않은 학문, 소화되지 않은 철학은 글쓴이를 위선자로 만들기도 하고 읽는 이를 청맹과니로 만들기도 한다. 허영은 국어사전 그대로 겉치레에 불과하다. 알맹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글(98쪽)과 비교해보면 이외수씨는 참 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개중에는 간혹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성실한 태도로 글을 대하고, 실제로 머릿속에서 사고한 평범한 생각들을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예상 밖의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또 그 대상이 자신들의 전문분야일 경우, 꽤 유익한 글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정은 이와 정반대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도달할 수 없는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글을 쓰고 있다. 실제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위대한 사색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연극을 꾸미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주장을 날조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난해한 문체와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신조어를 섞어 장황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독자들의 자신의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복잡한 문장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대중에게 자신의 편협한 지식을 감춰야 한다는 은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자신의 미숙한 사상을 마음껏 덧칠한 후 위대한 철인의 그림자를 흉내내고자 몸부림친다. 이 같은 몸부림의 목적은 이 난해한 문장 뒤에 진실로 위대한 사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데 있다.

만약 그대가 글쓰기에 자신감이 없고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쇼펜하우어의 책은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문맥을 흐트리더라도 문장론의 글을 더 인용하고 싶었지만 글쓰기의 공중부양 279쪽의 '점검'을 지키기 위해 인용을 자제했다. 그럼 점검에 있는 내용 몇개를 옮겨보겠다.

장대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바꾸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적 양심이다. 개발자의 양심이기도 하겠다.

산만하지는 않은가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로 글을 쓰면 문장이 산만해진다. 마음이 들 떠 있는 상태로 글을 쓰면 문장이 산만해진다. 과욕을 부리면 문장이 산만해진다 (후략)

지루하지는 않은가

독자들에게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라지 말라. 그것은 자신의 문자고문을 끝까지 참아달라는 요구와 동일하다. 자신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철학이나 지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다. 대가리는 용인데 꼬랑지는 뱀이라는 뜻으로, 처음은 좋은데 나중은 신통치 않음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지나치게 이론을 의식하지 않았는가

창작이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고등어라면 이론은 그 고등어를 잡아서 깡통 속의 통조림으로 제작하는 행위와 진배없다. 고등어의 대가리와 지느러미와 내장들을 제거하고 토막을 친 다음 깡통 속에 집어넣고 가열, 살균하면 통조림이 된다. 자신의 창작물이 통조림과 흡사해지기를 원한다면 이론의 틀에 맞추어 글을 써도 무방하다.

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았는가

청국장 맛이 나는 작품을 읽고 크림스프 맛이 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는 독자들도 있고 햄버거 맛이 나는 작품을 읽고 해물탕 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독자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상당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독자들도 부지기수다. 물론 작가는 독자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독자를 신봉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장인정신과 작가정신만으로 독창적인 문학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래서 진실한 작가는 독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한 챕터의 초안이 완성될 때마다 점검해야할 내용이다. 잊지 말아야겠다.

Comments

8 thoughts shared

01

오스카

엇, 무슨 책일까나... 설마 세계 정복? ㅎㅎㅎ

02
R

rath

아닙니다. 추리고 추려진.. 프로그래밍 관련 서적이에요 ㅎㅎ

03
X

xhoto

나 한권 줘 ㅋㅋㅋ

04
R

rath

나오면 ㅋㅋㅋㅋ

05

아크몬드

좋은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06
R

rath

좋은 글 쓰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07

도트

글쟁이로서 저런 종류의 책들도 한 번 정도는 훑어줄 필요가 있을텐데 말이에요 쩝.

08
X

xrath

그저 서점에 걸어가서 훑어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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