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지금 눈 앞에 있는 일이 아니라, 제껴놓은 일들이다.
과거
나는 심지가 그다지 굳지 않아서 이곳 저곳 뿌리내리며 사는 사람이지만, 과거를 살지는 않는 것 같다. 살면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끔 후회도 하고.. 뭐 그렇게들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 언제부터 과거를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20살때였던가, 10차선 대로를 파란불이 깜빡깜빡 할 때부터 건너기 시작했는데 너무 고속으로 뛰다보니 주머니에서 삐삐(beeper)가 떨어졌다. 물론 떨어진 당시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고 길을 건너고 난 뒤 삐삐를 찾다보니 없어서.. 다시 거꾸로 건너며 어디에 떨어졌는지 확인했다. 불행하게도 자동차님이 내 삐삐를 밟고 지나가셔서 납작하게 뭉개져있었다. 이 순간, 왜인지 모르겠지만 0.1초만에 체념하고 새로운 삐삐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기뻤다.
후회를 하는 동안에는 괴로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원상태로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뭐랄까 비생산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서, 후회하는 행동의 장점을 최대한 뽑아보려고 노력해본다면, 후회하면서 신나게 괴로워하여 머리속에 잘못된 선택을 각인시켜서 미래에 되풀이될 잘못된 선택을 방지하는 것 정도이다. 이러한 방법은 절대로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잘못된 유아 교육이 이런 후회에서 오는 쇼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겁먹고 활동성만 떨어지지.
과거를 살지 않는다. 트라우마에 기인된 행동도 과거를 사는 것이라 보일 수 있겠지만, 트라우마는 과거의 쇼크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확실하게 각인되어 현재 시점까지 실제로 이어지는 것이므로 트라우마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것은 과거를 살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인다.
과거를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자기 자신이 과거의 자신보다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의 자기 자신이 초라해서 자꾸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라고 믿고 싶은 것만 같다. 뭐 당연히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발전도 없고.
현재
현재를 사는 것. 나는 이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참 서술하기 어려운 녀석이라고 느낀다. 우리에게는 이드(id)와 자아(ego)가 있다. 이드는 과거가 과거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과거가 간섭한 부분이 있다고 해봐야 누적된 자기 자신일 뿐이다. 하지만 자아는 상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시쳇말로 이미지 관리가 필요한 녀석이다. 이미지 관리라는 것은 명확히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자신인 것처럼 연기하는 기술이다. 혹은 스스로 과거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것처럼 몰입을 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자아는 과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몰입(flow) 상태는 자아가 일시적으로 소멸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편이다. 옆에서 보면 참 지 기분대로 사는 것 처럼 보이고, 내일을 걱정하느라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도 않고.. 그렇게 저렇게 하는데 참 행복해보인다. 이러한 존재를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은 아무거나 대충 트집잡아서 깎아 내리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그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미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영리한 활동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를 무시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말이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준비하며 사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삶의 조각을 위해 사는 불쌍한 사람이다. 스스로의 하루하루를 묶어보면 어떤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도구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찌 문맥이 있을 수 있겠는가. 루즈 커플링된 인간.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컴포넌트들은 루즈 커플링일수록 좋다고 알려져있다. 자기 자신을 훌륭한 도구(루즈 커플링된)로 만드는 사람은, 그 대상이 꼭 다른 사람이 아닐지라도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날려버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훌륭하게 자라온 도구님은 자신이 준비해왔던 미래에 도착하게 된다. 이제 그는 자신이 준비해왔던 그 미래에 왔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열심히 완성한 컴포넌트들을 조립해서 조금 더 큰 컴포넌트를 만들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리게 된다.
그래서 다들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나 보다. 문맥이 없는 삶은 지겹거든.
가끔 이렇게 정리하지 않고 핵심도 없고 딱히 근거도 없는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내뱉으면 머리가 정화되는 기분이 들어 뿌듯하다. 말하기와 비슷한 면도 있는 듯 하다. 미리 많이 생각하지 않고, 작성한 글을 검토하지 않고, 뭐든 주르륵 써내려간 다음, 확 엎질러 버리기. 머리속에서 둥둥 떠나니며 flush 되지 못해 슬퍼하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데는 말하기가 제맛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이렇게 글로라도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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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jazz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얼마전에 읽었는데...아직 다 못읽었지만 거기에 모닝페이지라는게 나오더라. 매일아침 일어나자마자 노트 3쪽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써내려가는거래던데...정말 쓰잘대기 없는 글이라도 무조건 3쪽을 채울때까지는 일어나지 말래. 다 쓰면 찟어서 어디 봉투같은데 넣고 절대 그 누구도 못보게 하고... 그걸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하다보면...뭔가 보일거래나... 거기도 '배설'이라는 표현을 쓰는것 같더군. 나도 한번 해볼까 생각만 하고 있어. ㅎ
hjazz
음...가급적 컴퓨터보단 직접 쓰는게 좋을 것 같고... 그렇게 아침마다 3쪽분량의 머리속 찌꺼기들을 쏟아내버리면 창조성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네. 기분도 맑아짐을 느낀다 그러고. 치유의 글쓰기래나... 직접 해봐야 알 수 있을 듯...
http://blog.naver.com/sunny98989?Redirect=Log&logNo=70036780449
@seokkyun han 저같은 경우 마인드맵에는 손이 잘 안가게 되더라고요. 그 결과 마인드맵 소프트를 거의 써본적이 없는데.. 컨셉드로우 한번 시도해봐야겠네요. trial도 문제 없겠죠? £199 라 쉽사리 지를 생각이 들지 않네요 ㄷㄷ
@hjazz 메모장 하나 띄워서 보글보글 써보고 있는데 나름 괜찮은 거 같아. 기분이 맑아지거나 치유가 된다기보다.. 머랄까 주제가 가볍지 않아서 머리속으로 완성할 수 없었던 것들을 글로 보글보글 내뱉고나니 왠지 해방된 기분도 들고. ㅋㅋ 한편으로는 좀 우울한 기분도 들어. 치유의 글쓰기(?) 없이 아주 친밀한 사람 하나가 이야기를 들어주면 더 좋을텐데, 친구가 없어서 종이에 쓰고 찢어버린다고 생각하니 왠지 굴욕이기도 하고 -_-; 여튼 current context를 무시하고 뭐든지 말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다. 절제의 반대를 달리는 기분이고. 그래서 저 블로그 글 쓰신분도.. 더 잘 웃게 되고 화도 더 잘 내게 되었다는게 아닐지 생각해봄!
bluex
공통점이 있었다는걸 발견하고... 내가 기뻐하는것은 왜그런거야?
98년 비싼 노트북을 도난당하고는 친구들이 쐬주를 사주며, 나만빼고 다 우울 모드로 위로 하려 할 때....
그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황장군을 그때 알았으면 진정 나를 위로? 할 수 있었겠다 싶네.......
내가 분실을 뒤로하고 어떻게 그 이후 행동했게? 만약 궁금해서 언젠가 질문하면 그 때 답 드리리다~ 즐밥하세요
@bluex 공통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은.. 의도된 연출이 아닌 자연스러운 행동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고 느끼는 일종의 안도감이 아닐까요? -_-; 중학교때 기독교반 써클에서 수련회를 갔었는데, 갑자기 방언 시간을 갖는거에요. 참 어이가 없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 저 빼고 다들 방언을 하고 있는것처럼 보이는거에요. 저는 당연히 가만히 있었는데.. 수십명의 무리중에 저처럼 '쟤네들 뭐야? 왜저래?' 하는 사람 1인을 찾았을 때 느끼는 기쁨과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ㅎㅎ
그래도 그시절 제가 이사님을 알았다고 해도.. 제 머리속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슬픔을 느낄 것이다'가 입력 되어있을테니..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술을 많이 먹었으면 '그래도 저같으면 이렇게 생각했을것 같아요. 중얼중얼' 했겠지만요 ㅎㅎ
이후 행동이 쉽게 추측되지 않네요. 다음에 메신저에서 뵈면 꼭 물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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